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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invited yet, 210530

pearl.k 2021. 6. 3. 00:24

 

 집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다. 인테리어나 분위기가 좋고 카페를 운영하시는 주인 부부의 커피에 대한 자부심과 철학이 대단하셔서 좋아하게 되었다. 인테리어에서 빈티지한 감성이 곳곳에 보이는데 특유의 취향이 느껴져서 좋아한다.

 여기 테이블은 공부나 업무를 보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주로 책을 읽으려고 방문한다. 이곳의 편안한 분위기 덕분에 혼자 가서 충분한 충전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누군가 채워주는 게 아니라 혼자 채워낼 수 있는 그런 장소인 셈이다. 눈치 보지 않고 책을 읽으면서 혼자의 편안함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서.

 나 말고도 같은 목적으로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카페에 들어가자 마자 이미 앞 테이블에서 두 명의 남자가 각각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둘 다 종이책을 보고 있었다. 빈티지한 분위기와  조명, 통 유리창으로 화사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한 명은 등지고 있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종이책이 무거워서 e-book으로 준비해왔는데 그 둘의 종이책 감성이 주변 분위기랑 너무 잘어울려서 내 아이패드가 이질적으로 보였다. 속으로 '아, 나도 종이책이나 가져올걸.'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만큼 그 분위기에 그 둘이 녹아있었던 것 같다.

 평소 자주 마시는 바닐라 라떼를 시키고 소파에 기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옆에 통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가득 받으면서 화면 속 글자에 집중했다. 귀에는 아날로그 감성의 유선 이어폰을 꽂고 미리 준비해온 얼터너티브 록이 담긴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점점 몰입했다. 그다지 빠르지도 않고 베이스도 완벽하면서 리듬감이 있는 얼터록 장르와 감정적인 문장이 가득한 일본소설의 조화는 중독적이다.

 눈 앞에 서정적인 문장과 빈티지한 풍경이 동시에 보인다. 귀도 즐겁고 커피도 맛있고 로스팅하면서 나는 커피 향까지 거의 모든 감각이 충족되는 현장이었다. 다만 종이책이 아니라서 책장을 하나 하나 넘기는 촉감을 느끼지 못한게 아쉬웠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내 마음이 충전될 수 있음에 놀랐고 이 공간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내 바로 앞자리에서 책을 읽던 남자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선다. 늦은 점심 때를 캐치하고 나가는 것 같다. 오전 내내 책을 읽은 것 같은 복잡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선다. 앞 남자가 나가고 나니 그 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사람을 기억할 때 얼굴이나 외모를 기억하는게 아니라 분위기나 그 사람의 느낌을 기억하는 편이라 그런지 지금 다시 떠올리는 중에도 얼굴은 전혀 기억이 안난다. 대신 옷차림이나 어떤 자세로 책을 읽었는지가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은 카페 구석에서 유리창을 마주보고 햇살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책을 세워놓고 읽고 있었다. 그 사람의 시야를 상상해보면, 아마 책 뒤에 후광이 펼쳐지고 있을 거다. 그렇게 서로 각자의 책을 읽다가, 그 사람이 유리창을 마주보고 있는 이유를 알아냈다. 그 사람은 유리창 너머 테라스에 누워 있는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 책에 눈길 한 번, 고양이에 한 번. 번갈아서 보는 모양새가 참 바빠보였다.

 결국 고양이가 승리했다. 그 사람은 갑자기 일어나 성큼성큼 고양이를 향해 간다. 갑자기 일어나서 비장한 발걸음을 테라스로 옮기길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나도 독서를 멈추고 고양이를 봤다. 몸이 새까맣고 배는 정말 하얀 고양이었다. 말랑말랑하게 보이는 몸과 달리 눈매는 조금 매서운 고양이었다. (그치만 귀여웠다) 그 사람은 밖으로 나가서 햇빛 밑에 늘어져 누운 고양이의 등과 배를 쓰다듬어줬다. 마치 그 고양이의 아빠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쓸어내리는 모습에 나도 호기심이 들어 창문 너머의 고양이와 남자를 동시에 관찰했다.

 고양이와 남자는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라는 느낌을 풍겼다. 둘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주변에 지나가며 구경하는 사람들(물론 나도 포함해서)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와 남자 사이의 공기가 다른 느낌. 남자는 고양이를 쓰다듬기도 하고, 자신에게 한 발자국 다가오는 고양이와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한 10분~15분 정도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남자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카페 카운터 옆에 개방된 곳에 작은 세면대가 있었다. 처음에 나는 세면대가 있는지 몰랐는데, 그 남자가 물을 틀자마자 쏴아아 하고 쏟아져 나오는 시원한 물소리에 세면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남자는 한 두번 온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 된 단골손님? 이라기엔 카페 주인 부부와 친한걸로 보아 가족 같이 보이기도 했다. 10여분의 짧은 시간동안 카페와 남자와 고양이의 관계에 대한 수많은 추리가 머릿속에서 이어졌다. 그동안에 남자는 손을 다 씻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다시 책을 들었다. 그 일련의 행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주위의 모든 것이 그 남자를 중심으로 그린 하나의 그림 같았다. 카페와 남자와 고양이 이 세 가지는 완벽한 하나의 그림이었다. 주변 분위기, 주변 사람들도 그들이 이 공간의 중심임을 알아차렸다.

 문득 소외감이 들었다. 나도 나름 단골이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장소에 녹아들지 못한 느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내 주변의 분위기를 바꿔보기로 했다. 원래 듣고 있던 플레이리스트를 끄고 아예 새로운 음악을 켰다. 평소에 마음 속으로 좋다고 생각했지만 일종의 고집으로 인해 안 듣던 팝가수의 노래가 있다. (인싸 노래를 거부하고 사클을 고집하는 홍대병 때문이긴 한데) 카페 배경음악으로 나오길래 그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곡 몇 개를 추가해서 들어봤다. r&b 기본에다가 레트로 느낌이 나는게 나름대로 소설과 잘 어울렸다.

 소설 플롯도 절정이었고 노래도 좋아서 집중력과 읽는 속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 호흡 그대로 소설의 완결까지 달렸다. 4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이 단시간에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다 읽고 나서도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해놓았다.

 다 읽었는데도 쉽사리 자리를 뜨기 어려운? 무거운?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사라지는 게 싫었다. 좀 더 여운을 느끼고 싶어 늦장을 부렸지만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가야만 했다. 독서에 집중하다가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해 남은 커피가 싱거워졌다. 이곳 커피는 산미나 향이 대단한데 그런 커피를 남기게 된 것에 대한 죄책감? 주인 부부에 대한 미안함이 생겼다. 다음에는 하루 전체를 비우고 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폰을 끼고 거리로 나와 돌아가는 골목에서 오늘 일을 다시 새겨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