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생일 기념 긴 글 근황

pearl.k 2024. 2. 27. 18:28
더보기
아무 상관없지만 뭔가 재밌고 뭔가 슬픈 썸네일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근황 올립니다.

오늘 올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제 생일인 겸 주변에 전해드리면 좋을 이야기가 생각나서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축하를 받으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ㅎㅎ) 이과로 전향한지도 이제 5년차인데 아직도 글을 쓸 때면 문과가 되어버리는 기분입니다. 아무래도 20년 동안 쌓인 경험이 관성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주변에 연락하지 않는 동안 엄청 바쁘기도 했고 나름대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진로 때문에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나름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이룬 것도 없고 제 노력이 헛된 것이었나 싶은 괴로움이 꽉 차서 방황하기도 했어요.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느꼈습니다. 뭔가 중요한 시험이나 전형에서 한 단계 두 단계씩 통과해도 제 실력으로 통과한게 아닌 것만 같았고 갈수록 자신감을 잃어갔습니다. 중요한 성적과 결과를 앞두고도 무덤덤해졌고 남에게 제 상황을 완벽하게 숨기거나 아예 처음부터 공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것은 지난 시간을 너무 허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입니다. 이런 생각이 슬슬 머릿 속에 자리 잡게 되자 겉잡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에 잠식되는 순간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왔습니다. 혼자 보내는 밤이나 혼자 쓰는 일기에 점점 그늘이 졌습니다. 행복한 상상을 하며 잠이 들었던 아이는 이제 잡념을 잊고자 억지로 눈을 감습니다.

제가 스무 살일 무렵에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라거나, 머릿속이 꽃밭이다...라는 욕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랬던 아이가 스물 다섯이 되어서는 누구보다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못미더운 사회를 계속 마주쳐야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를 현실에 꺼내놓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상을 좋아했던 저를 현실의 세계로 억지로 끌어다 놓았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고, 나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 나가고, 새로운 자리에 계속 저를 꺼내놓았습니다. 억지로라도 이런 일을 한 이유는 현실과 내면, 두 개의 분리된 공간 사이에 괴리를 느끼고 계속 깨어있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밖에 나가다보니 주변 사람들에 의해 생각이 차차 바뀌었습니다. 남이 봐주는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저는 일을 맡기고 싶은 사람, 이름만 알지만 친해지고 싶은 사람, 열심히 하는게 멋진 사람 등등...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 자신에게 의외의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혼자인 것 같이 느껴져도.. 최후의 보루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힘들 땐 차마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항상 같은 거리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개가 그들의 존재를 가리지 못하게 이제서라도 서로를 붙잡아야 합니다.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미궁 속에서도 얇은 실이 서로를 연결하고 있음을, 분명히 길이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근심이 벽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내 키 만큼 쌓여 두 눈을 가려버릴지도 모릅니다. 벽을 허문 앞이 얼마나 넓은 지 잊어버리고 스스로의 한계를 정해버릴지도 모릅니다. 근심이 쌓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엉성하게 쌓은 벽돌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근심의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면 벽돌은 안으로 무너질 것이고 결국 파묻히는 슬픈 말로로 끝납니다.

이 근심들이 나를 향하지 않도록 만듭시다. 벽이 있으면 밖을 향해 깨부수면 됩니다. 저는 남탓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극한의 시기까지 와서 본인 탓을 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것만 느껴졌으니..

일단 근심을 제쳐두고 난 후에 보는 시야는 더 넓을 것입니다. 그 때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면 됩니다. 스스로 화살을 꽂기보다는 꾸준히 정중한 멘트로 회고 시간을 가지는게 도움이 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정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정중하게 대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정중하게 대해주겠습니까.

 

후회에 대해서도 잠시 말해볼까 합니다. 

다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합니다.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가장 좋아보이는 것을 고르는 것입니다. 알고리즘에서는 이를 Greedy(탐욕법) 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선택의 순간에서 이 방식을 따르곤 합니다. 실제로 이런 방식은 때때로 정답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서 정답이 될 순 없습니다. 알고리즘을 모르시는 분들은 "매번 최선의 선택을 했는데 왜 정답이 아니야?"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이럴 때는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결과를 비교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시간선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다만,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도 정답이 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는 아직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 볼 수도 없습니다. 그나마 인생의 끝에 다다라서야 가늠해볼 수 있겠지요.

어린 시절의 저는 남들보다 빠르게, 지름길로 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여겼습니다. 특히 빨리하는 것을 중시하는 민족성이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시간에 대한 압박이 한국인들의 셀프 족쇄가 되곤 합니다.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느낄 때나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심리적 압박감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돌아가는 것도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에게는 쓸데 없이 시간을 소모하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험을 잘 다듬어 다음 선택을 더 좋은 선택으로 만들면 됩니다.

저는 올해 스물 다섯, 그리고 오늘 자로 만 24세가 되었습니다. 곧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요, 아직 저랑 동갑이거나 한 살 많은 친구들이 대입이나 유학 준비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이유는 저마다 다양한데 평소에 공부 필요성을 못 느꼈다가 불현듯 뒤늦게 시작하게 된 친구, 공부할 상황이 여의치 않아 때를 기다리다가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한 친구, 꿈을 찾지 못해 여러 학과를 방황하며 삼수-사수를 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 방황과 기다림은 인간 성장에 있어서 필연적일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분야의 친구들을 곁에 두면서 저마다 즐거운 길로 나아가는 모습이 큰 귀감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돌아가기도 하고 시간을 소모하며 자신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합니다. 본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나서 내린 선택들과 잘 모르는 상황에서 한 선택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선택의 근거가 더 명확해지고 인생을 보다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 또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아이유 노래의 타임라인을 언급하곤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유 초기 시절의 노래만 좋아하나, 그동안 그녀가 음악으로 풀어낸 전체적인 시간 흐름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무 살에는 어리숙한 소녀였다가, 스물 셋에는 어떤 걸 고를지,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헷갈려 합니다. 그러다 스물 다섯의 팔레트에서 비로소 "이제 좀 알 것 같아" 라고 말합니다.

저도 아마 이제 좀 알 것 같은... 시간대에 들어섰나 봅니다. 올해 생일은 제 인생에서 가장 조용한 생일이지만 내년은 또 다를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개인적으로 제 생일 즈음의 시기를 좋아합니다. 졸업과 입학 사이의 시즌으로 누군가에겐 마침표를 찍는 시기이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겨울의 끝자락이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이며 노란색 프리지아가 더없이 잘어울리는 시기입니다. 

아직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면 그것을 깊이 고민해보는 한 해를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니면 저처럼 "조금 알 것 같은?" 그런 시기라면 스스로를 다듬어보고 중요한 선택에 들어가도 좋습니다. 곧 3월이 옵니다. 다들 올해에는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