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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2012

pearl.k 2021. 5. 31. 22:24

 

- 2021. 05. 30 -

*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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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20세기 후반 일본 건축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20대의 젊은 건축가가 주인공이자 화자로서, 그가 존경하고 사사하는 일본 건축계의 거장 '무라이 슌스케'와 함께 작업하면서 겪은 여름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 '사카니시'는 평소 신입을 뽑지 않는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에 입사하게 된다. 근 몇 년만의 신입인 주인공은 사무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첫 건축가 생활을 시작한다.

 그가 신입으로 뽑힌 이례적인 사건에는 사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설계 사무소가 국립 현대 도서관 건축 경합에 참가하게 된 것. 무라이 슌스케 선생님의 노년을 장식할 건축물로 설계 사무소의 모든 일원이 이 경합에서 이기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특히 원작의 제목은 <화산 자락에서>이지만, 번역본의 이름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로 바뀐 이유가 있다. 무라이 슌스케 설계사무소는 매 여름마다 특별한 장소인 '여름 별장'에서 건축 작업에만 몰두한다. 주인공이 입사한 후 바로 경합 준비를 위해 여름 별장으로 가게 된다.

 중요한 경합에 임하는 열정, 사회인으로서 첫 임무를 맡은 책임감,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한 명의 건축가로 인정받는 일 등, 사카나시 개인의 일적인 부분에서 매우 중요한 여름이었다. 또한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사랑과 선생님의 건강 악화로 인한 심리적 충격 등 개인의 감정이 한없이 요동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 해, 한 계절에 겪은 일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는데도 수려하고 물 흐르듯한 문체로 모든 전개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작가와 무라이 선생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연주의"를 함께 느껴야 한다.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여름 별장이고 여름 별장은 자연 속에 존재한다. 원 제목처럼 별장이 화산 자락에 위치하기도 하고 소설의 중간에는 자연 경관이 섬세하게 묘사되거나 동물, 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주인공인 '사카나시'도 어릴 때 부터 탐조회(조류를 탐구하는 모임)를 했고, 사무소 직원 중 '유키코'는 식물이나 경작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지식이 해박하다. 이런 인물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에 대한 대화 주제는, 자연을 사랑하고 지식이 풍부한 작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또한, 무라이 선생님이 추구하는 자연주의 건축 양식에 주목해야 한다. 선생님은 항상 자연 경관, 주변을 고려한다. 주변과 하나의 그림처럼 어우러지면서도, 사람의 생활 양식에 불편함이 없는 건축을 고집한다. 사람이 사용하기에 가장 편한 동선을 고려하면서도 자연과 어우러지는 소담스러운 디자인까지 놓치지 않는다. 소설 속 소개된 무라이 선생님의 건축물 묘사를 보면 소박하다 못해 소심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자기 주장이 옅은 작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실용적이어서 시간이 오래 지나도 큰 결함이 발견되지 않고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느낌이 드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이런 건축물의 느낌은 선생님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선생님의 건축만의 느낌을 살리는 문구로는 '누워있는 고양이 같다' 라는 표현이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선생님의 라이벌 건축가는 아주 정반대의 성향으로, 화려함을 과시하고 사람의 관심을 극대치로 끌어모으는 건축을 추구한다. 그의 건축은 인기는 많지만 결함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주변을 무시하고 지은 건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조화되지 않고 주변 경관을 이겨버릴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와 반대로, 선생님의 건축은 정말 자연의 일부라고 칭할 수 있다. 그다지 건물이 눈에 띄지 않아도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다.

 게다가 선생님은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가구 하나까지도 무시하지 않고 직접 디자인하는 등 아낌 없는 투혼을 보여준다. 선생님의 최근 걸작 중 하나인 교회 건축 과정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나, 도서관 설계 경합에서 과정 중에 가능한 모든 세부사항을 고려한다. 교회의 의자와 의자 배치, 도서관 내부의 책상과 의자까지. 사용자들의 편안함을 위해 새로운 오리지널 가구를 고안할 정도이다. 소설 속에는 사용자들의 사소한 불편함까지 고려하는 모습이 세심한 문체로 완성되어 있다. 읽어보면 불편함이 해소되는 느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손가락으로 문질러서 먼지를 닦아내는 듯한 간지럽고도 소박한 느낌의 해소감이다.

 무라이 선생님은 이렇게 설계 단계에서 세부사항 까지 고려하는 이유를 태아의 손가락으로 비유한다. 설계 단계에서 가구까지 생각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태아의 형성 과정을 보면 납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아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할 때, 손가락이 먼저 생기고 손가락을 통해 주변의 세부적인 모든 것을 느끼게 된다. 가구나 주변 소품들도 태아의 손가락과 같아서 전체를 생각 할 때 외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세부적인 것을 느끼면서 다가가야 한다는 비유였다. 소설을 완독하고 하루 지나서 감상을 쓰고 있지만 이 비유는 아직도 기억에 진하게 남아있다.

 또한 선생님에게서 현대 건축에서(특히 효율성과 빠른 완공을 중시하는 한국 건축에서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든 '장인 정신'을 느꼈다. 여태껏 건축가에게 집 건축을 의뢰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건축을 의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 속에 새로운 파도가 일렁였다.

 무라이 선생님이 건강 악화로 인해 쓰러지는 바람에 도서관 경합에서 지고 말았지만 선생님과 사무소 직원들이 열성을 다해 완성한 국립 현대 도서관 설계도와 모형의 이미지는 독자들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설계도를 그림으로 한 번도 보여주지 않고 모두 문장으로 표현했으나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체 덕에 매번 설계도나 건물의 모양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곡선의 아름다움도, 정방형의 편리함을 위한 육각형과 원주의 조합은 추상적인 형태로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소설 속에서 벌집을 언급한 장면을 보고 벌집 모양으로 형상화하기도 하고 때로는 원을 기준으로 곡선이 다부진 모습으로 형상화하기도 한다. 또렷하고 구체적인 형태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추상적이게 상상이 되지만, 이조차도 작가의 노림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림수에 당해서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전략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사랑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작가가 사랑하는 자연과 건축 양식을 미루어 보면 사랑을 다룰 때도 섬세하게 다룰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기지 않는가? 소극적이고 무뚝뚝한 화자 '사카니시'는 여름 별장에서 '마리코'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무라이 선생님의 조카딸로 유복하고 전통적인 집안의 외동딸이어서 피아노 유학을 다녀온다든지, 가업을 물려받는다든지 하는 특별한 사람이다. 그래서 평범한 환경에서 자란 사카니시에게 이질감을 종종 느끼게 하는 여자다.

 사카니시는 마리코를 묘사할 때 모든 감각을 사용해서 묘사한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스칠 때의 촉감, 잠깐 닿은 손과 발의 촉감을 떠올리기도 하고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오 드 뚜왈렛 향기나 샴푸 향기로 그녀를 찾아낸다. 또한 경쾌하고 말수가 많은 그녀의 목소리를 기억해서,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아도 귀가 그녀를 쫓아가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작중에서 무라이 선생님은 사카니시와 마리코를 결혼시키고 싶어하는데 사카니시의 소극적인 성격,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에서 오는 우유부단한 태도 등에 의해 둘은 헤어지고 결혼도 무산된다. 그의 묘사에선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과, 속수무책으로 끌렸던 마음 등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에서 항상 직구를 던지는 것은 마리코였다. 마리코가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를 이끌지 않으면 둘은 함께 있기 힘들었다. 성격의 차이도 분명히 있었고 둘이 자연스럽지 못한 느낌이었다는 은유가 소설 곳곳에 남아있다. 게다가 사카니시가 마리코에게 느끼는 가정환경의 이질감까지 더해져서 그들의 이야기는 <한 여름밤의 꿈>처럼 강렬하고 짧게 끝을 맺었다.

 여름 별장에서 사키니시와 마리코가 뜨겁게 연애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연스럽게 사카니시의 옆에 있었던 사람은 오히려 유키코였다. 직업도 같고 바라보는 방향도 같으며 관심사도 자연이라서 이야기 할 구석이 많았다. 서로 작업하면서 손이 겹쳐도 자연스러웠고, 작업 중에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통하는 장면이 나온다. 동시에 마리코는 즐겁게 웃는 둘을 뒤에서 바라만 보는데 이런 순간의 장면에서 사키니시가 마리코와 헤어지고 유키코와 이어진다는 암시를 줬다. 또한 사키니시와 유키코가 같이 작업하게 되는 일이 많이 생기면서(선생님 친구의 책상을 복원해주는 작업이나 도서관 설계 작업 등) 둘 사이의 유대감이 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둘이서 캄캄한 밤 여름 별장으로 돌아가면서 등불 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의지하며 걷는 장면을 볼 때, 둘의 모습이 마치 부부가 어둠 속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서로 손을 잡을 때 자연스러운 느낌과 그 장면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느낌은 덤이다. 연애 관계 속의 자연스러움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더불어 세 명 간의 성격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사카니시는 무뚝뚝하고 말 수가 적은 편이다. 마리코는 밝고 쾌활하며 말수가 많다. 유키코는 차분한 성격이며 주변 사람들의 신뢰가 두터운 인물이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인물의 성격적인 면에서도 사카니시와 유키코가 본래적으로 어울림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우치다'이다. 작중에서 사카니시와 마리코 사이에서 삼각관계의 긴장감을 주는 인물이다. 사카니시도 항상 우치다를 신경쓰고 있고, 우치다와 마리코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했다. 우치다와 마리코는 사키니시가 나타나기 전에 애인과 친구 사이에 긴장감을 즐긴 사이로 우치다의 특이한 성격 덕에 진지한 애인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우치다는 영국제 고글에 고급 바이크를 즐겨타는 자유분방한 느낌의 젊은 남자다. 그는 성격답게 마리코를 장난처럼, 노는 것처럼 대했지만 사실 그의 마음 뒤에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있었다. 마리코를 빼앗겼을 때 아쉬워하는 것이 보였으니까. 무라이 선생님이 마리코의 짝으로 사키니시를 선택한 것을 알고 실망하여 무라이 설계 사무소를 떠나게 되었다. 선생님한테 잘린거나 다름 없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의 마지막은 자유분방한 성격 그대로이다. 덴마크에서 건축 일을 하던 도중 덴마크 여성과 결혼하고 일본으로 귀국하여 자신만의 설계 사무소를 차렸다는 이야기였다. 제멋대로인 성격이지만 일 할 때는 프로 의식이 빛나는 우치다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소설의 내용과 느낀 점을 쓰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다 읽고 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내 일상에 아른아른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었다. 나는 일본 소설 특유의 넉넉하고 부드러운 문장의 느낌을 좋아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표현력도 정말 좋아한다. 로마자 계열 문체는 한국어로 옮기면 본래 가진 울림이나 느낌이 조금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일본 소설은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겨도 비슷한 부분이 많고 한자가 겹쳐서 그런지 전해지는 느낌이 훼손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소설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이상적이고 탐미적인 부분의 결핍을 메워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한다.

 덧붙여 이 소설은 그동안 읽었던 다른 일본 소설과 비교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감각적인 이미지를 채워주었다. 이전에 읽었던 소설 중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이나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이은 또 다른 소설이 되었다. 앞의 두 작품이 인간의 본성이나 우울함이나 무거움을 담고있다면,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자연에서 비롯된 치유와 넉넉한 마음이 흘러 들어온다. 이전의 내가 퇴폐주의 자극적인 사조에 열광했다면, 지금의 나는 좀 더 안정된 상태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이나 넉넉함에 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문학을 탐미하는 이유는 문학 만이 채워줄 수 있는 고결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너무 바쁜 시기라서 문학이 채울 수 있는 넉넉함과 아름다움이 가지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낮에도 밤에도 내 마음 앞에 이 여름이 어른어른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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